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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동의 씨네톡]‘그래비티’ ‘로마’, 다시 태어나는 여성에게 바치는 헌사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 오프닝신은 인생의 은유로 보인다. 가정부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는 주차장 타일 바닥을 청소 중이다. 카메라는 배수 구멍에 물이 흘러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 물은 조금씩 밀려온다. 점차 양이 많아지면서, 처음의 잔잔한 물결과 비교하면, 거센 파도가 연상될 정도의 물이 세차게 움직인다. 청소가 마무리 단계에 이를 즈음, 물은 배수 구멍으로 모두 빨려 들어가고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아직 남아있는 물 위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가 비쳐진다. 그러니까, 평온한 일상에 어떤 사건이 발생해 걷잡을 수 없는 고난(파도)이 닥쳐오고, 이것을 극복해낸 뒤 시간이 흐르면 다시 평범한 일상이 찾아오는 인생의 어느 국면을 떠올리게 하는 오프닝이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여성이 어떤 사건을 겪은 뒤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로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전작 ‘그래비티’와 닮았다. ‘그래비티’의 미션 스페셜리스트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은 삶의 무의미와 대결한다. 딸이 4살 때 사고로 허망하게 죽어버린 뒤로 그는 집에서 직장으로, 직장에서 집으로 운전만 하며 조용히 오가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다. 딸의 죽음 이후 그에게 삶은 무의미 자체였다. 무의미는 생의 중요한 모든 것이 빠져나가버린 텅 빈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 영화의 우주가 스톤에게 그렇게 다가온다. 우주에 와서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고요함’이라고 답한다. 그의 마음은 무중력의 우주와 다를게 없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다니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삶.

우주선이 고장 나면서 무의미한 삶에 균열이 생긴다. 딸의 죽음이 예기치 못한 것이었듯, 위성의 파편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으로 밀어내는 것도 예상할 수 없었다. 삶의 비극과 위기는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오는 법이니까. 그는 이대로 우주의 미아로 죽을 것인지, 어떻게 해서든 지구로 돌아가 살아야할 것인지 선택의 순간과 맞닥뜨린다. 먼저 사망했던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가 환영으로 나타난 것은 생존을 위한 무의식의 발로였다. 지구로 돌아가 삶의 중력을 견디며 살아가라는 것.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했듯, 스톤이 소유즈를 타고 지구로 떨어지는 장면은 ‘착상’을 연상시킨다. 이제 그는 무의미를 벗어던지고 두 발로 굳건히 일어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스톤이 무의미와 싸웠다면, ‘로마’의 클레오는 남성과 폭력의 세상에 맞선다. 집안을 청소하고, 네명의 아이를 돌보는 지극히 소소한 일상에 페르몬(호르헤 안토니오 게레로)과 사귀는데, 그는 클레오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치듯 떠난다. 임신한 클레오가 찾아가지만, 봉을 휘두르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협박을 일삼는다. 급기야 페르몬은 1971년 멕시코 민주화시위에 폭력의 가해자로 등장해 클레오를 위험에 빠뜨린다. ‘그래비티’의 스톤처럼, 인생의 크나큰 상처를 입은 뒤에 클레오의 삶 역시 무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여성은 ‘의미없음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살아있음의 희망’을 간직한다. 그들의 삶이 이전보다 더 좋아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더 나아질 것이라는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시 태어나는 마지막 관문이 물인 것은 자연스럽다. 물은 죽음과 생명이 교차하니까. 지구로 추락한 소유주는 깊은 강물에 빠진다. 스톤은 필사적으로 탈출해 기어코 땅을 밟는다. 클레오는 거센 파도 속으로 걸어들어가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구해낸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행위였다. 두 여성 모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에게 여성은 어떤 고난도 이겨내는 영웅이다. 두 영화를 보고 나면, 소설가 제임스 설터의 말이 떠오른다.

“더 어려운 일을 안고 있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단호히 맞서며 살아가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에서는 여성이 그런 경우죠.”

[사진 = 워너브러더스, 넷플릭스]

곽명동 기자 entheos@my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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